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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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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개요
여산척화비는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척화비는 비문이 선명하다. 서체는 해서체(楷書)이며, 크기는 높이 114cm, 폭 46cm, 두께 9cm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비(通碑)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상세정보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 여산척화비
여산척화비는 2002년 5월 30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척화비는 대원군이 병인양요(1866년) 때 척화의지를 발표하고 신미양요(1871년) 이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동래, 부산진, 함양, 경주 등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공사관의 요구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어 인근 땅에 묻었다가 1915년 이후에 발견되었다. 여산척화비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를 현재의 여산동헌으로 이전하였다.
여산동헌 건물 옆으로는 여산에 부임하여 온 여러 관리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그리고 여산 초등학교 주변에서 옮겨온 척화비(斥和碑) 등 9기의 비가 진열되어 있다.
척화비는 비문이 선명하다. 서체는 해서체(楷書)이며, 크기는 높이 114cm, 폭 46cm, 두께 9cm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비(通碑)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쇄국정책의 산물, 척화비
조선왕조는 1860년대를 맞이하여 서구 열강의 침투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세의 침투로 인한 자구책으로 마련된 것이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이었으며 이것의 산물로 나타난 것이 전국의 주요 지점에 세워진 척화비라 하겠다.
이러한 척사론(斥邪論)은 조선 말기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민족사상의 큰 줄기였던 바 19세기 중엽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20세기 초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열강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왕조의 유지를 위하여 나타난 것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었다.
1860년대를 필두로 하여 밀려온 열강들의 통상 요구는 서양문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었으며, 더구나 봉건적 전제체제에 익숙한 조선왕조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라는 대혼란을 겪은 결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더욱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는 척화비문을 반포(頒布)하고 더욱더 쇄국양이정책을 고집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