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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및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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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낭산면

지금의 낭산면은 본래 백제국의 알야산현(閼也山顯)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때 야산(野山)으로 고쳤고, 한때 금마(익산)에 영속되었다가 고려때에는 낭산(朗山)으로 고쳐 전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는 여량감무(礪良監務)의 관할에 있게 되었다.


조선정종2년(1400년)에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의 두 현(縣)을 합하여 여산군(礪山郡)이라 했다.1914년 낭산면(소재지 호암리)으로 익산군의 관할에 있게 되었다. 1959년 면사무소 소재지가 삼담리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1992년 망성면 어량, 호천 일부가 낭산면에 편입되었다. 1994년 2월 현재의 청사가 신축되었으며,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에 따라 익산시 낭산면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의 명칭은낭산(朗山)이 여산(礪山)의 옛 이름이었기에 그에서 취해진 것이다. (면의 主山인 朗山(낭산면 낭산리 소재)에서 취해졌다해도 어원은 같다.)

호암리(虎岩里)
1916년 시목리(枾木里), 신동리(新洞里), 신안리(新安里)의 전 지역과 명천리(鳴川里), 돈산리 (敦山里)의 일부로 구성됨. 里名은 里內에 범바위라고 하는 낮은산이 있고 그 산에 범의 머리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붙인 이름.
  • 내돈(內敦, 안돈다메) '돈다메'를 위치에 따라 內, 外로 구분한 명칭. 뒤의 산을 '돈산(敦山)'이라 하는 본시 그 산이 돈대(敦臺)로 되어 있으니 '돈대뫼 돈다메(돈다매)'일 것이다. '돈대(敦臺)'라는 말은 일찍부터 대중화하여 순수 국어와 같이 쓰였다.
  • 외돈(外敦, 바깥돈다메). 신안동(新安洞). 넘말 '외돈'은 '내돈(內敦)' 참고 '신안동'은 1930년 경에 형성된 마을로 새터, 안동리→신안동(新安洞) '넘말'은 '너머마을'의 준말
  • 신동(新洞 새터) 1930년경에 생긴 마을로 '새터'의 한자표기 시명(枾鳴).시목(枾木 감나무골).명천(鳴川, 부분명→음지뜸, 양지뜸, 아래뜸) '시명'은 1972년 '시목(枾木)'과 '명천(鳴川)'을 병합한 분리명.
  • '감나무골'은 감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
  • '명천'은 미륵산에서 내려오는 낭산면의 물로 홍수때면 제방이 그곳에서 자주터져 농민을 울리므로 '울내→명천(鳴川)'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여울내→울내'가 아닌지?
삼담리(三潭里)
1916년 죽산리(竹山里), 삼지리(三池里), 상북리(上北里), 하북리(下北里)의 전 지역과 오동정리(悟桐亭里), 명천리(鳴川里), 오미리(五美里)의 西 3面에 속햇던 가산리(加山里)의 일부로 구성됨. 里名은 대사제(大沙堤), 소사제(小沙堤). 북지제(北枝堤)의 세 못이 있어 三潭이란 이름이 생김. 동국여지승람에는 대사지제(大沙地堤), 소사지제(小沙地堤), 북지제(北枝堤)로 기록됨.
  • 오동정(悟桐亭, 오동정이).
  • 마을 서북편, 못의 북편에 오동나무가 정자를 이뤄 생긴 명칭. 노인들이 어렸을 때는 3가호 뿐이었는데 강경에 다니는 길가이므로 여름에는 거의 그 정자나무 아래서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 상북지(上北  ,뒷갓, 윗뒷갓).
  • '뒷갓'을 상, 하로 구분한 명칭 . '뒤'는 '後', '北'의 뜻이고 '갓'은 '말림갓' 이라는 말과 같이 임야나 시초림(柴草林), 또는 '곁(傍)→갓'등의 뜻.
  • '枝'의고어는 '갖'. 하삼지(下三池). 하북지(下北枝, 뒷갓, 아래뒷갓). 삼지(三池, 삼못). 매골
  • '하삼지'는 '하북지(下北枝)'와 '삼지(三池)'를 합친 분리명.
  • '하북지(下北枝)'는 '상북지(上北枝)' 참고
  • '삼지'는 대사제(大沙堤), 소사제(小沙堤). 북지제(北枝堤)의 세 못 중 가운데 못의 옆에 있는 마을.
  • 죽산(竹山, 대메), 구레뜸, 신기촌, 아래삼못.
  • '대메'는 예전부터 마을 뒤편에 대밭이 무성하기에 생긴 이름. 메 = 산
  • '구레뜸'은 좀 깊숙한 곳이기에 일컫는 이름('구레'는 구렁 또는 좀 우묵한 곳을 말함)
  • '신기촌'은 새로 생긴 마을의 뜻
  • '아래삼못'은 '삼지(三池)'의 아랫동리
  • 오미(五美, 외밋), 부분명-솔모통이, 시거리.
  • '외밋'은 뒷산의 동북편 밑에 있으므로 뫼(山) 밑의 마을이라 하여 '뫼밑→외밋→ 오미→五美'
  • '솔모통이'는 솔밭 모퉁이.
  • '시거리'는 삼거리
석천리(石泉里)
1916년 하석리(下石里), 상석리(上石里), 구북리(舊北里), 신북리(新北里)의 西 4面에 속했던 호천리(狐川里)의 전 지역과 마산리(馬山里)의 일부로 구성됨.
  • 구방(舊坊). 구북(舊北, 북성<北城>). 방교(坊橋, 방아다리). '구방'은 1972년 구북구북(舊北)과 방교(坊橋)를 합쳐 명명한 분리명. '북성(北城)'은 마을 북쪽에 낭산성지(朗山城趾)가 있어 본시 '북성(北城)'이라 했는 데 마을이 둘로 나뉨으로써 '구북(舊北)''신북(新北)'의 구분명을 씀. 우리 지명에 '방아다리'는 좁은 들이 아래편에 가서는 넓어지던가, 지형이 삼각형 이거나, 길이나 내(川)가 두 갈래로 갈라진 곳을 디딜방아의 방앗다리와 같다하여 일컫는 이름인데, 이 방아다리 역시 근처의 지형이 삼각형으로 되어있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신북(新北, 북성). '구방' 참고.
  • 상석(上石) 석천대(石泉臺)의 윗 동리이므로 일컫는 명침.
  • 죽림동(竹林洞, 대소반<대숲안>). 대숲에 쌓여있어 이루어진 명칭. 생성년대가 오래지 않은 마을로 전에는 '上石'에 속했었음.
  • 석천대(石泉臺). 하석(下石). 십자거리(사거리). '석천대'는 바위 사이에서 물이 많이 나는 공동 우물이 있으며, 마을터도 일부는 암반으로 되어있고, 동산이 대(臺)를 이루고 있어 생긴 명침. 석천대는 옛 기록에 자주 보이는 유상처(遊賞處)이므로 대명(臺名)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에게 동명(洞名)이 취해질 수도 있다.
  • 마산(馬山) 뒤의 산이 마산(馬山)인데 그것이 말의 형국이라고도 하고, 또 조선 성종때 함안 군(咸安君)이 이곳에 정착하여 말을 방목하였기에 생긴 명칭이라고도 한다.
  • 호천(狐川, 여수내, 여우내) 내(川)의 이름에서 취해진 명칭. '여우내'는 북성(北城)쪽에서 흐르는 어량천(漁梁川) 상류로 전에는 여울을 이룬 급류였으므로 '여울내→여우내→여수내→호천(狐川)'이라 함.
낭산리(朗山里)
1916년 하랑리(下朗里), 상랑리(上朗里), 우금리(牛今里)의 전 지역과 성남리(城南里), 내산리(內山里), 장평리(長坪里), 西 4面에 속했던 돈산리(敦山里)의 각 일부로 구성됨.
  • 내산동(內山洞). 산속 깊숙이 자리잡은 마을이기로 생긴 명칭.
  • 장암(長岩, 마당바우). 건너뜸. 넒은 바위가 많이 있어 일컫던 명칭. '마당바위→장암(長岩)'
  • 상랑(上朗, 낭산<朗山>, 윗낭산, 성채). 전에는 상하의 구별이 없이 싸잡아 낭산(朗山)이라 했는데 동리 가운데로 도로가 생김으로써 분리됨. 뒤의 산 이름인 낭산(朗山)에서 취해진 이름.
  • 낭산을 '성채'라고도 함은 성(城)이 있는 재이므로 '성재→성채'. 하랑(下朗, 낭산, 아랫낭산), 모롬들. 상랑(上朗) 참고.
  • 우금(牛今, 소곤리) 소쿠리(方言, 소코리)를 많이 만들던 곳이어서 '소코리 마을→소곤리 마을'設. 30년전까지도 소쿠리를 만드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함.
성남리(城南里)
1916년 신정리(新正里)의 전 지역과 성남리(城南里), 장평리(長坪里), 신리(新里), 익산군(益山郡)의 구문천면(九文川面)에 속했던 죽청리(竹靑里)의 각 일부로서 구성됨.
  • 내성(內城, 성내미<城南>, 안성남) 낭산성(朗山城)의 안에 있는 마을이므로 이르는 명칭.
  • '안성만'은 '바깥성남'과 위치에 따라 구분한 이름. 외성(外城, 선내미, 바깥성남). 점촌(店村). '내성(內城)' 참고
  • 점촌(店村)은 도자기를 만드는 곳
  • 죽신(竹新). 대판이(竹靑, 낭산대판이). 신리(新里). '죽신(竹新)'은 1972년 '죽청(竹靑)'과 '시리(新里)'를 병합한 분리명.
  • '대파니'는 대밭이 많아 파랗다하여 '대파라니→죽청(竹靑)'. '낭산대파니'는 삼기면 대파니(大파)와 구분된 명칭.
  • '신리'는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일컫는 명칭. 신강(新江). 신정(新正 新井). 강변(江邊, 부분명-원고개).
  • '신강(新江)'은 1972년 '신정'과 '강변'을 병합한 분리명.
  • '신정'은 전에 물이 좋은 샘이 있어 이루어진 명칭. (새샘→新井)
  • '강변'은 신정천(新井川)가이므로 이름.
구평리(龜坪里)
1916년 상주리(上舟里),하주리(下舟里), 西4面에 속했던 신기리(新基里)의 전 지역과 신리(新里), 장평리(長枰里), 성남리(城南里) 西 3面의 명천리(鳴川里)와 돈산리(敦山里) 각 일부로써 구성됨. 里名은 里內의 복구들(伏龜坪)에서 취한 것이다. 복구평은 들 한가운데에 5천여평 되는 좀 높은 지대가 있는데 그것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며 풍수설에 '금구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 장평(장평, 부분명-비암내<뱀내뱀내>) 도토마골, 장사산. '장평'은 앞 들이 길게 쭉 빠져 있으므로 '긴들→장평(長坪)'
  • '비암내'는 전에 비암(뱀)이 서린 것처럼 꾸불꾸불한 내(川)가 이곳으로 흘렀기에 생긴 명치
  • '장자산'은 부자(長者)가 살았기로 부르던 이름.
  • 노동(蘆洞, 가리동, 가루동). 예전에는 갈(갈대)만 우거진 곳이었으므로 '갈의동→가리동→노동(蘆洞)'
  • 하단(下丹, 아랫마단, 하마단). '아랫마단'의 '마단'은 '마당' 즉 작업장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을 뜻하며, 그레서 이루어진 말이지만 윗편을 '윗마당' 아래편을 '아랫마당'이라 하는 바와 같이 '곳'의 뜻으로도 쓰임. '아랫마당→아랫마단'. 상단(上丹, 윗마단, 상마단). '하단(下丹)' 참고.
  • 맹동(孟洞, 맹골). 건너편 마을 '한기'는 근처에서 오래된 마을인데 '맹골'은 그 '한기'에서 바라보이는 마을이므로 한기마을 사람들이 망골(望골)이라 부름으로써 생긴 명칭. '망골→맹골' 지명에 있어 '망골, 망산, 망동' 등은 거의 먼저 생긴 건너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곳인데, 그 중 본시 그런 뜻의 '바람골, 바라뫼'등을 '망(望)'으로 한자표기한 곳도 있고, 처음부터 '망골'이라 부른 곳도 있다. '망(望)'은 일찍부터 대중화한 말.
용기리(龍機里)
1916년 반룡리(盤龍里), 장등리(長登里), 도마리(都馬里)의 전 지역과 가산리(加山里), 중리(中里), 한기리(閑機里), 西 4面의 오미리(五美里), 西 2面의 맹동리(孟洞里),함열군(咸悅郡)의 東 4面에 속햇던 동신리(東新里)의 일부 토지로써 구성됨. 里名은 반룡(盤龍)과 한기(閑機)에서 취해진 것.
  • 가신(加新). 가산(加山, 더메, 멍에목) 신성(新成) 반룡(盤龍, 발용). '가신'은 1972년에 위 두 마을을 합쳐 분리명으로 명명한 것. '가산(加山)'의 '가(加)'는 이두(吏讀)에서 '더'로 읽는 字니 '가산'의 원명(原名)이 '더메'고, '더메'는 동리 뒤가 두두룩하므로 '덤뫼'라고 하던 것이 '더뫼'로 변했다. '덤'은 '부덤'이란 말과 같이 두두룩한 곳을 뜻한다. '신성'은 새로된 마을 이므로 생긴 명칭. '반룡'은 풍수설에 반룡혈(盤龍穴)이라 하여 이루어진 명칭이라 함.
  • 장등(長登, 진등, 낭산진등). 마을 북편의 구릉 등성이가 길게 뻗어있어 긴 등성이란 뜻으로 '진등'이라 하였고, '장등(長燈)' 참고(잔등).
  • '낭산진등'은 함열면의 진등과 구분한 명칭.
  • 덕영동(德靈洞), 덕룡골. 가치메. '덕'은 '언덕'의 옛말인데 '덕영, 덕룡'의 뒤가 길게 빠진 언덕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런 뜻의 '덕'일 것이고, '영, 룡, 용'의 원어는 미상. '가치메'는 까치가 맣이 서식했기에 생긴 이름. '메'는 산. 노인들의 말에 전에는 큰 나무가 많아 까치 천지엿다 함.
  • 중리(中里). 배바오(배바우). '중리'는 근래에 붙인 이름으로 가운데 마을이란 뜻. '배바우'는 전에는 포구로서 배를 매던 바위가 많아서 일컫던 명칭.
  • 하한(下閑, 한틀, 한기<閑機>, 아랫갱이<江里>). 원 이름은 '한틀'인데 '하한(下閑)'은 그것을 상하로 구분한 명칭. '한틀'은 근처에서는 비교적 큰 들이므로 '큰들'의 옛말. '한들→한틀' (大=한, 機=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