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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색 종교문화답사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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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색 종교문화답사 Ⅱ
원불교총부미륵사지여산백지사터여산숲정이성지화산천주교/나바위성당두동교회숭림사

1원불교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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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총부

원불교의 교화,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 역할 익산성지는 원불교 중앙총부가 자리 잡고 있는 전법성지로서 총부성지라고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9년(1924년)에 본격적인 대중 교화활동을 위하여 총부를 건설한 후 공동생활을 하며 전법활동을 시작하여 18년간 교화경륜을 펴다 열반에 든 곳이다. 이때부터 원불교 교역자들(전무출신)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며 일제식민통치와 교단창립에 따른 생활의 곤궁으로 인하여 소작작농, 엿장사를 하기도 하고 여자교역자들은 고무공장 공원을 하면서 밤에는 한 자리에 모여 대종사의 법설에 공부의 길을 잡아가는 영육쌍전의 산 도량이었다. 현재는 원불교의 교화,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좌산 종법사(이광정, 左山 李廣淨)가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해 역대 종법사의 사상과 경륜을 계승하여 도덕세계건설을 위한 교단 운영에 주력하고 있다.

2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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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3탑3금당 동양최대의 사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써 성격을 띠고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 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 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었다.

3여산백지사터

여산백지사터

백지사터는 동헌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대원군 집정 때인 1866년 병인 박해가 계속 진행되어 대학살이 감행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 붙이기를 여러번 거듭하여 질식사시키는 방법으로 일명'도모지사'라고도 하며 쇠국 정책의 분노와 증오에 양심과 신앙 자유가 질식한 곳이다. 예동헌 뜰에는 박해 사실을 증명하듯이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 있다.

4여산숲정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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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숲정이성지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있는 천주교 순교 성지이다.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그만큼의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이곳에는 '여산 순교 성지'라고 쓰인 대형 돌판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백지사 기념비가 서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기록상으로만 22명이 순교했다. 순교자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있다. 주변에 여산성지, 백지사지터, 여산동헌과 척화비등이 있어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며 천주교 순례자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

5화산천주교/나바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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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주교/나바위성당

나바위 성당은 조선 현종 11년(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초대주임이었던 베르모넬(장약슬, 요셉) 신부가 중심으로 1906년에 건물을 시공하여 1907년에 완공하였다. 성당설계는 명동성당 포아넬 신부가 도왔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다. 나바위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처음으로 전도하던 곳이어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지로 지정한 곳이며, 이 건물은 천주교의 한국 유입과 그 발전과정을 볼 때 서구식 성당 건축양식과 우리나라 건축양식을 잘 절충시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초기 성당 건물이다. 이러한 역사성과 건축양식으로 인해 나바위 성당은 국가지정문화재(사적 318호) 로 지정되어 있다.

6두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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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동교회

2002년 4월 6일 전북특별자치도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ㄱ'자형 평면의 한옥교회로 함석지붕에 홑처마 우진각 형태이다.
1923년 선교사 해리슨의 전도로 처음 설립되었으나 1929년 무렵 지금의 'ㄱ' 자형 교회를 새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ㄱ'자형 교회는 토착적인 자율성을 강조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개신교와 전통이 결합하면서 나타난 한국 교회건축의 독특한 유형이다. 남녀유별의 유교적 전통이 무너져가는 1920년대에 'ㄱ'자형 교회 건립으로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주면서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파하려 했다. 이 건물은 당시 사회의 상황과 건축적 특성을 나타낸 초기 개신교 교회건축물이다. 한국 기독교 전파과정의 이해와 교회 건축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7숭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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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림사

숭림사(崇林寺)는 신라 경덕왕(742~764) 때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익산지'에 보면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을유년에 행여(行如)선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숭림사에는 명문기와가 현재 보관중이며 익산 지역의 대표사찰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보광전'만 남고 불타버렸으며 이후 1697년(숙종 23년) 우화루와 영원전을 새로 창건하고 이후 나한전을 지었으며, 1987년에 주지로 부임한 지광스님께서 범종각, 산신각, 일주문 요사인 안심당과 해탈교, 세심교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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