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Menu
본문 바로가기

백제왕궁터

홈 > 테마여행 > 익산 100배 즐기기 > 백제왕궁터

백제왕궁터

* 테마안내
백제 궁궐에 꽃잎이 흩날리던 백제의 아름다운 왕궁리 유적지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

백제왕궁터

왕궁리 유적지

1965년 한 무리의 전문가들이 기울어 가던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수했다. 목적은 붕괴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보수 과정에서 한국사를 다시 써야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탑의 내부에서 역사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탑의 1층 옥개받침과 기단(基壇) 사이에서 사리병과 금제금강경판, 그리고 금동불상과 옥, 방울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출토되자 마자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이 탑의 주변에 대한 발굴 작업이 세밀히 이뤄졌다.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에서는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에 위치한 금당 건물터 조사가 이뤄졌다. 학계에서는 왕궁리 일대가 백제 무왕이 부여에서 이곳으로 나라를 옮긴 왕궁이었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왕궁리라는 현재의 지명은 그 이유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보면 왕궁리 유적지에서 탑을 중심으로 한 곳은 왕궁 내에 위치한 내불당이 된다.

백제왕궁터

백제왕궁터

국내유일의 백제왕궁터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금마을 뒷산 구릉지대를 지역 주민들은 '모질메' 라고 부르는데, 이 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위치는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km쯤 떨어져 야트막하게 전주행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대지이다. 이 성은 구릉지를 일부 깎아내리고 주변은 흙으로 쌓아올려 세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건물을 배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명'왕궁평성'이라고 불리는 이 유적지는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결과 남북의 길이는 약 450m, 동서의 폭이 약 234m의 반듯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무 공간과 생활공간, 후원공간을 배치한 궁성유적이다. 궁성 내부의 전반부에 정무공간인 대형건물을 두고 후반부에 후원시설인 정원을 배치하는 조영방식은 중국 북위 낙양성의 궁성배치 방식과 비슷하며, 정원시설이나 대형 화장실 유구 등의 부속시설은 일본 평성경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왕궁리유적을 통해 한·중·일 삼국의 문화교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성은 일반적인 담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큰 폭이 약 3.2m정도의 궁궐 성벽이 일부 노출되어 백제의 궁성지로서의 가능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그리고 성의 축조기법이 백제양식이었으며, 백제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하여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고 있어 이 성(城)이 지닌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전각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백제의 자연친화적 조경기술을 보여주는 정원시설 등의 궁성관련 유구가 밝혀지고 전달린토기, 8엽 단판연화문수막새와 인장와(수부명 기와), 유리, 금제품, 도가니 등 총 4,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백제왕궁의 면모가 더욱 선명해졌다.

백제왕궁터

왕궁리유적지 아래에는 2008년 12월에 개관한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소개하고 출토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데 전시관 초입부는 커다란 궁성 문이 열려져 있다. 백제궁성 이야기로 시작하여 왕도였음을 입증하는 전달린토기, 유리제품, 금제품 그리고 수부명 기와가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형 화장실 모형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선조들의 위생관념도 엿볼 수 있는 재마난 유적이다. 재 왕궁평성내에는 1997년 1월 1일로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춧돌, 백제 시대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관상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유적지내에 국보 제289호 익산왕궁리 5층석탑이 있고, 인근지역에 익산 미륵사지가 9.6 ㎞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왕궁터

백제왕궁터

무왕이 강성 백제를 꿈꾸던 곳

왕궁의 외곽을 둘러싼 담장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 돌 등을 사용하여 폭 3미터 규모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남쪽 담장의 돌들은 정성을 들여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실제로 이곳을 발굴 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오층석탑과 금당과 강당 등 사찰관련 유적은 왕궁의 주요 건물들이 위치해야 할 자리에 있고, 석탑의 하부에서 목탑지 또는 선행한 왕궁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추측컨대 사찰로 변 한 시기는 의자왕 시기를 전후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삼국사기'의"금마군 대관사의 우물이 핏빛으로 되어 다섯 장(丈)이나 흘렀다"는 기록이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된 탑사를 말해준다.

왕궁리 유적지에서는 백제시대 기와류인 연화문수막새,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와 토기류인 대형 항아리, 시루 등이 출토되었으며, 인장와 손잡이달린 이형토기, 변기형토기 등도 발견 되었다. 그 외에도 녹색 유리편, 유리구슬과 함께 금사, 금구슬, 금사뭉치, 금제화형장식 등의 금속제품들도 함께 나왔다. 대개 발견된 유물들이 제작된 연대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제가 화려하게 부활한 후 계속 유지가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경주의 불국사처럼 우람한 탑과 절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는 않았겠는가? 왕궁유적지에서 출토된 기와나 주춧돌을 가지고 옛날의 왕궁이나 웅장한 절을 상상해 본다. 백제의 실체는 보는것보다 만짐으로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이곳 일대에는 어디나 기와 조각들을 볼 수가 있다. 조각난 역사의 편린(片鱗)을 만지면 옛 사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왕궁리 유적지를 걸어보라. 과거로 한 발씩 상상여행을 떠나게될 것이다.

만족도조사

정보관리

  • 담당부서 : 문화관광과
  • 담당자 : 박기원
  • 전화번호 : 063-859-5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