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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마룡
관광브랜드 캐릭터 ‘마룡’입니다.
무왕이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에서 창안.
우리 마룡이와 함께 고백도시 익산 여행하세요!

준왕과 익산

준왕과 익산

《고려사》지리지 스캔 이미지 《고려사》지리지

준왕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중국 사료에는 기원전 194년 위만의 공격을 당한 고조선의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한韓 땅으로 들어와 스스로를 한왕韓王이라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마한인馬韓人이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기준이 내려온 곳이 익산 금마라고 전한다. 익산에서 나오는 이 시기의 유적과 유물은 기준과 익산이 관련이 깊을 것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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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마지막 왕, 익산에 닿다

동쪽으로 향하는 배위에 타고 있는 준왕과 신하들 그림

동쪽으로 향하는 뱃머리에서 준왕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신하로 거둔 위만에게 배반을 당한 심정을, 다른 신하들에게 보여선 안 된다. 기준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 정든 대륙의 영토를 뒤로 바다를 건너며 와신상담을 다짐했을 것이다. 조상의 뼈를 묻은 고토를 두고 한韓의 땅으로 향하며 짐작이나 했을까? 고향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먼 훗날, 익산이라 불릴 이 땅에서 자신과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뼈를 묻게 될 거라는 비장함.

배가 도착했다.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한 배였으므로,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름으로 배에는 많은 짐이 실려 있었다. 금강하구 혹은 만경강으로 이어지는 옥룡천 어디메쯤 드디어 뱃머리는 육지에 닿았고, 왕이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대륙의 문화가 마한 땅에 상륙했다. 고조선의 마지막이 익산의 처음이 되는 순간.

익산에 문화가 뿌리내린 것은 삼천 년이 넘는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인 익산, 익산은 본래 마한국이었는데, 조선왕 준이 위만의 난리를 피하여 바다로 해서 서쪽으로 내려와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준왕이 익산으로 온 것도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청동기 세력을 알았을 터. 그러나 준왕의 이주부터 익산은 기억된다. 기록으로서의 익산의 시작이다.

준왕은 연나라에서 망명 온 위만에게 변방의 경계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에 의해 익산으로 떠나야 했다. 단군부터 이어오던 조선의 역사가 이렇게 끝났다. 그가 도착했을 무렵 익산지역에 마한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마한을 건립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허나 기준이 금마 즉, 현재의 익산지역에 터를 잡은 후, 이곳은 마한시대부터 바람의 중심이 되었다.
준왕이 마한에 터를 잡음으로써 미륵산 일대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부족 세력이 중앙세력으로 발전했고 마한은 곧 백제의 바탕이 된다.

기원전 200년경, 중국의 하북성 지역에서 조선의 정체성이 한반도로 옮겨온 일대 사건이 익산지역에서 발생했다. 고조선 준왕의 망명 사건은 한민족 상고사의 정통성이 단군조선에서 삼한으로, 삼한에서 삼국으로 이어진 익산지역의 정체성의 시작이다.
준왕이 바다를 건너 와, 이 땅에 심은 씨앗이 백제의 30대 왕 무왕대에서 꽃으로 피기까지 천년의 향기로 익산은 성장했다. 미륵사지 경내를 거닐면 고조선에서 이어진 백제의 향기가 천 년 전의 바람으로 남아 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고도古都 익산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후준侯準’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거하였다.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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