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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마룡
관광브랜드 캐릭터 ‘마룡’입니다.
무왕이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화에서 창안.
우리 마룡이와 함께 고백도시 익산 여행하세요!

마한문화와 익산

마한문화와 익산

율촌리 분구묘 율촌리 분구묘

마한은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립되어 기원후 3세기까지 약 500년간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었던 정치체이다.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 조선시대 사료에 서는 “익산군은 본래 마한국이었다”고 익산과 마한을 연관짓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익산 영등동·율촌리·어량리·구평리·장신리·송학동 등지에서는 마한시기에 해당하는 분묘유적과 생활유적이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장신리 유적 출토 탄화미 장신리 유적 출토 탄화미 송학동 유적 출토 유리옥 거푸집 송학동 유적 출토 유리옥 거푸집

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모습

익산은 살아있는 역사이다. 한민족 역사의 여명기黎明期라 할 수 있는 고조선 과의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삼한·백제·후삼국·고려·조선까지 우리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다. 익산은 경주와 부여 그리고 공주와 함께 4대 고도古都이면서 각 시대의 특징들을 담고 있는 곳은 익산이 유일하다. 익산은 청동기문화의 한 중심축을 이루었고 이때부터 문화를 일궈온 땅이며, 오래된 역사만큼 깊은 혼이 새겨진 땅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 따르면, 고조선 준왕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남천하여 한의 땅에 와서 한왕을 자청하였다. 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해서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은 금마金馬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한 54국 중 하나였던 건마국은 어떠한가? ‘건마’는 익산시 금마면의 ‘금마’와 서로 통하는 음이며, 익산 내에서 발견된 청동기유물로도 그 존재는 확실해지지 않던가.

우리 민족 역사의 정통성을 담보하고 있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의 남천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왕궁면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前漢鏡이다. 초엽문과 반리문이 새겨진 전한경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천한 시기인 기원전 194~180년 사이와 일치한다. 이와 더불어 결정적 증거로 철기를 들 수 있다.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유입되기 전 이미 중국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바로 고조선 준왕의 남천 직후와 맞물려 있다.

익산에 정착한 준왕과 그의 무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한서》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한다. 준왕을 비롯한 고조선 무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고 결국 토착세력이었던 마한인들이 득세했다는 것. 고조선 세력을 대체한 마한인들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 마한인의 생활흔적은 장신리유적, 송학동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신리유적에서는 총 27기의 집터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토기와 함께 불에 탄 쌀 등 곡물이 발견되었으며 송학동유적에서는 다양한 생산도구가 발견되어 마한의 생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의 마지막 역사부터 마한, 백제 그리고 조선까지의 역사를 지닌 유일한 땅, 익산. 익산의 역사적 물결은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은은하면서 단아하게 흐르고 있다. 익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적 찬란함이 묻힌 도시이고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진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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