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내촌리 출생. 정창업(丁昌業)의 문인. 7세때 이미 창악가의 소질이 보였기에 부모가 그를 정창업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 공부를 하게 했다. 정창업이 그가 14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자 그후로 이날치에게 사사받았다. 그러나 2년 후 16세때 이날치 또한 별세하니, 그로부터 독공하였다. 오직 소리 공부에만 전념하여 익산의 신곡사(神谷寺)에서 수년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수년간 기예를 닦아 점차 소리가 성숙해지고, 다시 공주 갑사(甲寺)에 들어가 40세까지 연마 적공하여, 이때 이미 그의 실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가를 이룬 그는 마산에 가서 몇 해 동안 후배를 지도하는 동안에 그의 명성은 서울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1926년 서울에 올라가니,
조선초기의 문신,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초명은 진(晋). 본관은 안동(安東).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의 아들. 1368(공민왕17)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375(우왕 1)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정책을 주장했다. 1389(창왕 1)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때 부사(副詞)로 명에 다녀왔다. 이 때 가져온 명 예부(禮部)의 글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峰)에 유배되었다가 경주, 흥해, 김해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1390(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다시 청주로 옮겨졌다가 홍수 때문에 풀려 나왔으나 곧 다시 익주 지금의 익산군 팔봉면 임상리 몽관(夢官)으로 유배되었다.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팔봉면 출신. 1906년 4월 친구 박이환·문형모 등과 항일 투쟁할 것을 맹약하고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 총기 3백여 정과 탄약 20여 되, 군도 50여 자루, 화약 10여 되를 준비하고 의병 257명을 규합하여 1907년 11월 15일 고산 가금리에서 적과 첫 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고, 이어 진안·장수·용담·무주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한때 충남 대덕군 산내면 이사리에 피신하였었는데 왜경이 그것을 탐지하고 습격하였으므로 뒷산 오도산성에서 왜경과 교전하였다. 191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1920년 간도(間島)로 가서 김좌진을 만나고 이듬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는 도중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호는 화강(華崗), 본관은 강화(江華). 삼기면 출생, 부사과(副司果) 현중(顯中)의 아들. 일본 동경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 사법고시에 합격하였으며, 전주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법전편찬위원 감찰위원, 사법고시위원장을 역임. 대한민국 초창기에 청조소성훈장 및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한때 누룽지 검사장으로 통할 만큼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대한민국 건국 후 당시 상공부장관이었던 임영신(任永信)을 탄핵하였다가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관직을 버리고 계속 변호사로서 일관하였다. 아들 종백(鍾伯)도 법조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조선말기의 화가. 관인. 호는 석지(石芝). 본관은 평강(平康). 익산군 출신.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인물채색화를 잘 그렸다. 고종의 초상화를 비롯 전우, 황현등의 초상화를 그려 당대 유명화가로 인정받았다. 전주 남고산성에 있는 관왕묘(關王廟)의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도 그가 그렸다. 채용신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관직 재임시절, 재야 활동시절 등을 기록한 자전화(自傳畵), 체용신의 평생도(平生圖)를 소개한 자료 외에 그의 그림은 현재 행방을 알 수가 없는 상태다. 채용신은 집안이 어려워서 특별한 스승이 없었던 탓에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땔나무를 하며 주경야독했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호는 관재(寬齋), 본관은 남평(南平), 오산면 출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취규(聚奎)의 아들. 군산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이리 지방에는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상의하고 사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고 이날 이미 일제가 헌병과 보병부대 병력을 강화하여 대비하고 있어서 양측의 필사적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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