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김해. 익산군 오산면 출신. 부친은 구한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김내문(金乃文). 집안이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남전교회(南田敎會)에 다녔는데 1917년 최대진 목사가 부임하면서부터 독립에 대한 사상이 많이 고취되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난 이후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꽃처럼 퍼질 때, 이곳 익산(당시 이리)에서도 김만순의 집에 모여 여러 차례 숙의한 끝에 1919. 4. 4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3대로 나누어 행하여졌는데 제1대는 최대위 제2대는 문용기 제3대는 김만순이 이끌었다. 김만순이 이끄는 제3대동익산역(동이리)쪽에서 출발하여 시장 안쪽에 이르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김만순은 "우리나라를 영원히 잃느냐? 다시 찾느냐? 하는 이 위기 속에서 다같이 일어납시다" 하고 독려하던 중 일본헌병이 총을 쏘아 바로 뒤따라오던 자가 쓰러지면서 대열이 흩어졌다. 1947년 3월1일[기미독립선언기념익산군민대회]에서 표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