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오산면 출신. 1918년 배은희(裵恩希)목사와 협의하여 종교인과 일반인을 규합 지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월 10일 익산에서 이정(李挺)·이병석(李秉釋)·박사국(朴士國)·정영모(鄭永模)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대한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어 선두에 세우고 2백 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분견소로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 해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하여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르는 것이 어찌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고 반박하며 고등법원까지 상고 항쟁하였으나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처하게 되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와 정신이상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에 죽었다.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