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겸(韓百謙, 1552∼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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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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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문관, 자는 명길(明吉), 호는 구암(久庵), 본관은 청주(淸州), 금마면 출신. 경성부판관(京城府判官) 효윤(孝胤)의 아들, 민 순(閔 純)의 문인. 1585년 학문으로 천거되어 교정낭청(校正郎廳)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했다. 이듬해 참봉을 지내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1589년 죽임을 당한 정여립(鄭汝立)의 시체 앞에서 통곡하고 시체를 후히 염(殮)한 사실이 탄로나서 유배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사(大赦)로 풀려나 내자시 직장(內資寺 直長),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 청주목사(淸州牧使), 1607년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강원도 안무사(江原道 按撫使), 이어서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었다가 얼마 뒤 사임했다. 그는 역학(易學)에 밝아 선조 때『주역전의(周易傳儀)』를 교정한 바 있으며, 특히 그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여 실학(實學)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문집으로 <구암집(久庵集)>이 있다. 원주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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