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전시관 안내 > ZONE2 석재의 도시 익산
ZONE2 석재의 도시 익산

익산석의 역사적 배경
- 석재 문화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백제 지방인 황등 지역을 중심으로 번창하여 전국 방방곡곡으로 발전되어 나갔으며 1300년 이전 백제 석공 기술자들이 이웃 신라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여 불국사의 석가탑 및 다보탑을 건립하였다.
- 백제 시대의 미륵사지 석탑을 비롯하여 청와대 영빈관 등 현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우수한 유물과 가치를 이어가고 있으며 현재 아사달의 후손들이 국내의 석재 문화를 이끌고 있다.
- 익산의 석산은 전국 최초로 1858년경 청나라 사람들이 개발하여 그 2세들까지 경영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일본인들에 의하여 36년간 경영권을 빼앗긴 후 일제 시대 말기부터 국내인들에 의해 경영되기 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 전국의 석재 관련업에 진출, 전국 각지의 유명한 명승지, 사찰 및 관공서 등을 완공하며 석재 산업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있다.
- 1975년부터 수공업 형태로부터 발전한 현대적인 장비인 다이아몬드 절석 기계가 공급됨으로써 전국 1,000여개 업체로 확산, 발전되었으며 익산 지역의 70여개 업체 중 49개 업체가 전국 최초로 국고 지원을 받아 조성한 석 가공 전문 농공단지로 입주하여 활발하게 운영 중에 있다.
익산의 배경
- 익산은 옛 익산군, 여산도호보, 용안현, 함열현이 통합되어 이루어진 곳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금마저라 하였으며, 현재의 익산시는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어 익산시가 되었다.
- 익산시는 전북특별자치도 서북단에 위치하여 노령산맥의 천호산과 미륵산의 산세를 이루고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서부로 향하는 구릉과 대하천의 평원을 이루며 북으로는 금강과 남으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있다.

- 익산은 낮고 평탄한 구릉지와 비옥한 충적평야에 위치하며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중심지이자 동서 경계를 따라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마백문화권의 중심지로서 문화 고적의 발굴 및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장소성을 지닌 도시이다.
익산석을 사용한 건축물(역사유적, 유물-석탑)

미륵사지석탑(국보11호)
- 미륵사는 세 곳에 법당을 나란히 세우고 법당마다 탑이 하나씩 서도록 설계되었는데, 중앙의 목탑과 동편의 석탑은 없어지고 현재 국보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 6층 탑신까지 남아 있다. 이탑은 우리나라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고 또 가장 규모가 큰 것 으로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을 그대로 본떠 석탑으로 재현하고 있어 한국 석탑의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 236호)
- 당간지주는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소실되었는데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기단의 각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지주의 양쪽 바깥 면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도 선대를 한 줄 각출하였다.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리 오층석탑(국보289호)
- 백제 무왕이 왕궁을 조성했던 곳 왕궁리의 오층석탑이다. 왕궁리는 서동요로 잘 알려진 무왕이 궁궐로 조성했으나 의자대왕에 이르러 사찰로 변했다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지금 석탑이 있던 자리는 원래 목탑이 있던 자리인데 고려 전기 현재의 석탑이 세워졌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5호)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백제의 불상으로 머리부분을 제외한 몸의 높이는 156cm이며 광배 높이는 326cm인 화강암 불상이다.
- 머리부분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최근에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고 군데군데 마멸되어 원형을 잃긴 했지만 백제의 단독 석불로서 큰 가치를 갖는다.
금마 동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2 구(軀)로 높이는 4.24m의 화강석으로 되어있다. 넓은 대좌부터 좁은 머리까지 사다리꼴 석주에 대좌의 옷 무늬, 손과 얼굴 등을 나타내고 있어 마을을 수호하는 석상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태봉사 삼존석불(유형문화재 제12호)
- 익산시 삼기면에 있는 삼존석불이다. 1971년 전북특별자치도의 유형 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불은 결가부좌한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손에 감로수 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과 왼쪽에는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있는 광배를 갖춘 삼존석불상이다. 본존불과 두 좌우 부처불 그리고 광배가 함께 한 장의 판석에 새겨져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지만 근래 호분을 덧발라 석고처럼 보인다.
대구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
- 좌대 높이 13m를 포함한 30m 높이의 석불로 2000t에 달하는 불상과 3,000t 무게의 좌대석은 전북 익산의 익산석으로 만들었다. 이 도량에 오르는 계단은 108개로 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였고 석불 맞은쪽에는 약사여래 대불을 지킬 통일대불전이 조성되었다. 대불은 1990년 11월부터 조성에 착수하여 2년여의 대대적인 공사 끝에 1992년 11월 27일 점안 법회를 가짐으로써 완공되었다.
낙산사 해수관음입상(보물 제1723호)
- 동해의 거센 파도를 다스리는 듯한 관음보살의 상징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관음상으로 높이는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앞부분은 쌍룡상,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에는 감로수병을 받치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수인을 짓고 있다. 이 해수 관음상은 화강암의 산지로 꼽히는 익산에서 약 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익산석을 사용한 건축물(일제시대 건축물)
구 서울역사(사적 제284호)
-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에 있는 근대식 건물. 1925년 9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은 돌,벽돌 혼합 조적조 건물로서 서양에 서 18세기 이래 유행되어온 르네상스식 건축물에 비잔틴 양식의 돔을 올린 절충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역사이며 근대의 역사를 간직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1909년 10월 29일 중앙은행 즉 구 조선은행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으로 쓰이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행 본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 내부가 전소되어 1956년 보수를 하였고 그 후 1987년 본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
- 1916년 공사가 시작되어 8년 6개월 만인 1925년 12월 준공했다. 해방 후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이유로 1995년 철거되었다.
익산석을 사용한 건축물(관공서 및 기관 건축물)
청와대 영빈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 1978년 12월에 준공되었다.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로서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높이 13m, 둘레 3m이며 2층까지 뻗어 있다.
국회의사당(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 건축기간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이다. 의사당 본관은 정면에서 볼 때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높이 32.5m의 대열주 24개를 세워 건축되었다.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95)
- 후손들에게 민족의 얼과 긍지를 심어주기 위하여 1982년 8월 28일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 대회를 개최하고 8월 31일 국민의 성금모금을 시작하였으며 1987년 8월 15일 충청남도 천안시 독립기념관을 세웠다.
대법원청사(서울특별시 서초구)
- 1991년 11월 29일에 착공하여 약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95년 9월 23일 준공대지 57,692㎡(17,482평), 연면적 66,493㎡(20,149평)에 지하 2층, 지상 16층으로 구성되었다.
전북특별자치도청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로 225(효자동 3가 1번지), 2005년 서곡지구 신청사 건립
익산경찰서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배산로 165-12번지(모현동2가 289), 2001년 신청사 건립
익산의 석재산업
- 익산지역은 석재중에서도 가장 이용도가 높고 중요한 화강암이 가장 많은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 익산석은 건축용 장식이나 토목용, 비석 및 묘석, 공예품 등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 화강암과 사문암이 주로 매장되어 있다.
- 익산석은 그 우수성이 인정되어 시장 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석재사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 익산석은 일제시대부터 60~90년대 고도성장을 이루는 우리나라의 주요 건축, 기반시설에 사용돼 지역경제발전의 부흥을 이끌어왔으나 1990년대 값싼 중국산 수입석의 범람과 국내시장 잠식, 환경규제, 건축경기 침체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익산의 석산(채석장)
-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형태로 화강암을 채취하기 시작한 곳이 익산의 황등지구 석산이다. 조선 철종 9년 (1858) 경청국사람들이 개발하여 그 2세들까지 경영하였으나, 일제 침략으로 이들이 물러가고 일본인들이 36년간 경영하였다. 이 때 조선총독부, 서울역, 한국은행 등의 석조건물이 많이 건설되면서 건축자재로서의 익산석이 널리 사용되었다.
- 일제 말기부터는 한국인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원석의 채취는 석공, 묘비의 석물을 제작하는 석공, 묘비에 글씨를 세기는 각자공, 불교미술품을 제작하는 석공 등 여러 분야의 전문 공장이 생겨났다
- 1970년대 들어서서는 석산이 현대식으로 개발되어 철길로 전국에 수송이 가능해졌으며 2000년대에는 국내외에서 품질과 기술 우수성을 인정받아 일본에 진출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