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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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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 테마안내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마음과 왕비의 소원 이야기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1,400년을 하루처럼 산다

미륵사지에 들어서자마자 미륵산 아래 펼쳐지는 광활함이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한강유역을 잃고 이 땅에서 있던 1,400여년 전 무왕의 마음은 이랬을까? 최근에 복원된 동탑(1992년)이 청량한 풍경소리로 관람객을 맞는다. 1997년 개관한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가 보자. 전시관 한가운데 위치한 미륵사 축소 모형이 제일 먼저 눈에 띤다. 미륵사지의 3탑 3금당의 가람배치가 세상사 어지러운 마음에 고요한 질서를 전해준다. 미륵사지가 세워진 곳은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가 미륵산(용화산)에 사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도중 만난 미륵삼존불이 출현한 자리다. 기록에 의하면 왕은 왕비의 청을 받아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이 연못지를 메꾸고 미륵사를 지었다. 이곳은 백제의 왕권을 확립하려는 무왕의 꿈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는 후 천세계를 여는 3탑 3금당의 새로운 질서를 통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꿈꾸었던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는 무왕의 꿈이 담겨있는 19,000여점의 유물 중 4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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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둘러 본 후라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동탑(1992년 복원)에서 울리는 풍경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시대를 건너 온 소리. 꿈결인 듯 폐사지에청량하게 스민다. 국보 11호인 미륵사 서탑은 아직 해체·복원중이다. 미륵사지는 3탑 3금당의 가람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미륵이 하생하여 새 세상을 다스리듯 후천세상의 영도자가 되기를 소망한 무왕의 원대한 꿈을 보여 주는 것이다. 미륵사지의 중심에는 목탑이 있었고, 동·서에는 석탑이 있었다. 동쪽 탑은 1992년 복원되었으며, 서쪽탑은 6층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2002년부터 본격적인 해체복원 중에 2011년 1월 14일 세기의 사건이 일어났다. 부처님의 사리와 사리호, 금제금강경판 등 683점의 유물이 1400년의 잠에서 깨어난 것. 국보급의 사리함은 수천여점의 금과 구슬, 유리와 함께 심초석 한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처음 사리함을 봉안할 때 웅장한 돌들이 사리함위로 하나하나 꽃잎처럼 내려졌을 것이다.

미륵사지 박물관에서는 사리장엄이 출토된 석탑 내부를 공개하고 있어 누구나 그 역사적인 현장을 만나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사리봉안기를 비롯한 보물들은 지금 보존처리 중이어서 지금은 사진과 복제품으로 만나 볼 수 있지만 1400년 전의 빛이 뿜어져 나온 현장의 감동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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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안에는 가장자리의 돌들이 가지런하다." 돌을 어찌 그리 곱게 다듬었는지, 하이얀 버선코가 부럽지 않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돌들을 아무렇게나 깔아 놓고 그위에 진흙을 버무려놓은 듯 한데 천년이 지나도록 탑의 무거운 하중을 끄떡없이 견뎌냈다. 어떠한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한 조상의 지혜다. 목탑의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최초의 석탑. 이름 하여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이다. 폐사지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주춧돌과 터. 그리고 해체 시 내려 놓은 1400여년의 돌들. 그 앞을 우뚝 지키는 당간지주(보물236호) 2기. 역사는 말없이 흐른다는 말이 여기에서도 어울린다. 옛사람의 숨결은 이곳에서 남동쪽에 자리한 백제왕궁리유적에 이어진다. 이곳은 백제무왕의 왕궁으로 후대에는 왕궁관련 사찰로 사용된 사연이 있다. 시간이 되면 미륵산(해발 430m)도 등산하고 그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는 식당에서 순두부도 먹으면 하루 여행 코스로는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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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봉안기 발굴로 창건의 비밀 윤곽

서탑의 해체 작업 중 탑의 맨 밑 심초석에서 사리공이 발견됐다. 그 안에는 금동제 외호(外壺)와 금제 내호(內壺),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오롯이 남아 있었다.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가 타임머신을 타고 1400년 만에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이때 백제의 유물에서만 발견되는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銀製冠飾)이 680여 점의 유물과 함께 수습됐다. 역사의 타임캡슐이 유난히 세상을 놀래케 한 것은 기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사백년전의 백제인이 현대인에게 쓴 편지인 셈이다'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지의 창건이 백제 무왕의 왕후이자 좌평 사택적덕의 딸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기술되었다. 이로써 미륵사 석탑의 비밀이 풀리고 익산의 백제 역사가 재 조명되었다. 미륵사지 서탑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始源樣式)으로 의미가 크다. 축조과 정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크기와 조형미에 있어서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이와 똑같은 석탑이 동쪽에 또 하나 있었다. 현재의 동탑은 1974년 발굴 조사에서 동탑의 기단 규모와 형태가 발견 되어 1992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화강암으로 축조된 동탑에서 아직 서탑이 지니는 고풍스러운 맛을 못 느낀다고 불평이다. 그러나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지금 서탑의 아름다움을 후세들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 훗날을 생각하는 일. 천 년 전의 백제인이 서탑의 축조와 그 안에 봉안한 사리함으로 알려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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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사찰의 위엄 드러내던 당간 지주

당간(幢竿)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사찰 입구에 세운 기둥이다. 돌로 된 두개의 당간 지주 사이에 동(銅)이나 철(鐵)로 만든 막대기 모양의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불가(佛家)를 상징하는 깃발인 당(幢)을 꽂아 신성불가침 지역임을 표현한 것이다. 사찰의 당(幢)은 그 자체가 위엄이어서 당간의 규모가 사세(寺勢)를 드러냈기에 큰 사찰일수록 높이 세웠다.

전국 각 지역의 꼿꼿한 기상으로 세워졌던 당간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점차 수가 줄어들었다. 결정적으로 당간이 사라진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대동아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의 쇠붙이들을 수거했는데 전국에 남아나는 당간이 없었다. 전쟁수행을 핑계로 한 식민지의 문화말살 정책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찰에는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서 당간이 세워졌던 곳임을 표시해줄 뿐이다.

미륵사지의 남쪽에는 2기의 당간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 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단순의 미학은 절제된 위엄을 갖는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다른 곳의 당간지주와 다르게 화려한 장식이 적고 단정한 형태를 보인다. 이와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는 당간지주는 경북 영주시의 소수서원 내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부석사 당간지주 등이 있다. 미륵사와 같은 절이 세워질 수 있었다는 것, 더구나 남겨진 서탑과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탑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인들은 당시의 풍요로운 문화 환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문화는 공주와 부여를 거쳐 비로소 익산에 이르러서 활짝 꽃 피운 것이다. 미륵사지의 가람배치가 백제 문화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미륵사 서탑은 그 정신의 고갱이에 핀 한 송이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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