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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미륵사지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미륵산 아래 구릉 사이에 자리하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미륵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에 창건 기록이 전한다.
미륵사지석탑
미륵사지 석탑은 사역의 서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국내 최고, 최대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석탑의 시원(始源)이다.
미륵사지 사진
  •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師子寺)에 불공드리러 가던 중 용화산 밑 연못가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해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회랑을 각각 3개소씩 만들었다. 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람이었고, 습지를 매립하여 평지를 조성하였으며,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경에 따라 가람을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실은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는 중문, 탑, 금당, 강당, 회랑, 승방 등이 건립되었으며, 통일신라기에는 남측 당간(현재는 지주만남아 있음)과 남문지 주변이 확장되었다. 그 후 중원의 목탑에서부터 벼락 등의 피해를 입어 중원, 동원, 남측의 연못이 연차적으로 폐기되고 서탑 서측으로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서탑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사역의 북측(탑과 금당지 보다 1단 높은 위치) 일부에서만 사찰 경영이 이루어지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전후한 시기에 사찰 경영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 백제의 일반적인 사찰은 탑과 금당이 하나씩 배치되는 1탑1금당식이지만 미륵사지에서는 탑과 금당을 하나의 세트로 동서로 3개가 배치된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그래서 탑과 금당을 사찰 개념으로 생각하여 중원, 동원, 서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중원에는 목탑, 동, 서원에는 석탑이 배치되었다.
  • 이와 같이 미륵사에 3원을 배치한 것은 미륵이 하생하는 과정에 3회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 한다는 미륵하생경에 따라 건립한 것으로 현재의 미륵산을 용화산으로 부르고 사자사에 가는 과정도 미륵의 하생과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미륵사지의 탑지와 금당지는 가공한 화강석으로 2중기단을 만들었으며, 강당지는 단층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구조적인 측면이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백제건축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 현재 미륵사지에는 동탑이 복원되어 있다. 발굴조사 과정 동탑지 주변에서 탑신부와 상륜부 사이에 들어가는 노반석(露盤石)이 출토되었으며, 탑의 각층의 지붕돌(옥개석)의 크기가 다른 9종류가 수습되어 9층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92년 동탑 복원 과정에 주변에서 출토된 돌중 안전에 문제가 없는 것을 선정•재사용하였다.
미륵사지 사진01미륵사지 당간지주
  •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6층까지 남아 있었는데, 서측과 남측이 시멘트로 발라지고 누수로 인하여 탑의 경관을 해치고 안전에 문제가 제기되어 2001년부터 해체 복원 작업이 추진되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석탑 해체 과정, 탑의 십자형 통로 바로 위 심주석 상면 중앙에 한 변 24.8cm, 깊이 27cm의 사리공 내에서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금제쪽집게, 금괴, 금제귀걸이, 은제관식, 청동합, 금실, 유리구슬, 유리판 등 총 1만여점의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금제사리호와 사리봉안기이다. 금제사리호 안에는 작은 호가 있고 이 호 안의 유리병에 사리가 봉안되었다.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 10.5cm로 앞, 뒤면에 음각으로 파내어 글자를 새겼는데, 한 줄에 9자씩 11줄씩 총193자가 있다. 주요 내용은 석탑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로 재물(정재)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己亥-639년)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사리장엄이 발견되면서 한때 석탑 조성기에 기록된 내용이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와 달라 서동요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미륵사지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문헌사학자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나 백제, 신라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삼탑삼금당(삼원병립)의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었다. 미륵사지에 탑이 세개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서쪽의 탑만으로 미륵사 전체를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륵사의 중앙에는 목탑이 있었고, 동, 서측에는 석탑이 배치되었다. 사리봉안기는 세 개의 탑중 서쪽에 위치한 탑의 조성기일 뿐이다. 중앙의 목탑은 동서 석탑에 비해 규모도 크고 높이도 훨씬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륵사의 건립은 중원의 목탑과 금당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선화공주의 발원에 의해 미륵사가 건립되기 시작하여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께서 다음 왕후가 되어 서탑 부분에 한해 완성했다는 것이다.
  • 미륵사지석탑(서탑)은 2015년 12월 출토된 사리를 다시 봉안 하고 탑을 복원하여 2018년 말에는 완성할 계획이다.
미륵사지 관련사진01 미륵사지 관련사진02 미륵사지 관련사진03 미륵사지 관련사진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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