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유적(Archaeological Site in Wanggung-ri)
![사적 제 408호 왕궁리유적 전경](https://www.iksan.go.kr/upload_data/board_data/CONTENTS_FILE/161611461177771.jpg)
익산시 왕궁면 용화산 남쪽 끝 해발 40m내외의 구릉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이 백제의 궁성터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대동지지』(김정호)의 ´익산 별도別都´ 기록과 「관세음응험기」(일본 청렴원 발견)의 ´백제 무왕 지모밀지枳慕蜜地 천도´기록이 왕궁리유적의 소재지명인 왕궁면의 ´왕궁王宮´과 연관되어 백제의 무왕 혹은 보덕국의 안승, 후백제의 견훤이 경영하였던 왕궁터로 인식되어 왔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무왕대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출토유물일괄](/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2.jpg)
![연화문 수막새](/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3.jpg)
왕궁리유적은 평지성 구릉에 남북 492m, 동서 234m, 폭 3m 내외의 궁장을 두른 후, 내부에 경사면을 따라 4단의 석축을 쌓고 평탄대지를 조성하여 정무공간과 생활공간, 후원공간을 배치한 궁성유적이다. 궁성으로의 역할이 끝난 뒤에는 탑-금당-강당으로 구성된 1탑 1금당식 사찰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는대, 이는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오층석탑과 그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를 통해서 밝혀졌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전각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 백제의 자연친화적 조경기술을 보여주는 정원시설 등의 궁성관련 유구가 밝혀지고 전달린토기, 8엽단판연화문수막새와 인장와(「수부首府」명기와 등), 유리·금제품, 도가니 등 총 10,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백제 왕궁의 면모가 더욱 선명해졌다.
유적의 중심부에서 조사된 대형 건물지와 그 주변에서 출토 된「수부」명인장와는 부여의 추정 왕궁터인 관북리 백제유적에서만 조사되고 있어서 이곳 왕궁리유적 또한 백제의 무왕이 거주하였던 왕궁이었음을 입증해 주고있다.
![‘수부명’ 인장와](/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4.jpg)
![정전건물지](/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5.jpg)
![후원영역 수로시설](/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6.jpg)
![동서석축1](/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7.jpg)
![대형화장실](/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8.jpg)
![정원시설 중심부](/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9.jpg)
![회충알과 뒷처리용 나무막대](/images/tour2/heritage/heritage_04_10.jpg)
아래) 뒷처리용 나무막대
궁성 내부 전반부에 정전 건물을 두고 후반부에 후원을 배치하는 조영방식은 중국 북위 낙양성洛暘成의 궁성배치방식과 비슷하여, 정원시설이나 대형 화장실 유구 등의 부속시설은 일본 평성경平成京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왕궁리유적´을 통해 한·중·일 삼국의 문화교류 모습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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