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과 익산 백제문화
익산에는 금마면과 왕궁면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유산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을 비롯하여 미륵사지, 제석사지, 사자사지, 익산 쌍릉, 익산토성, 연동리석조여래좌상, 태봉사 삼존석불 등의 백제유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왕이 있다.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인 《삼국유사》의 무왕 기록과 제석사와 관련된 〈관세음응험기〉를 제외한다면, 무왕과 직접 연관되는 기록이 남은 문화유산은 거의 없지만, 무왕에게 익산이 얼마나 중요한 도시였는지 유적과 유물은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백제문화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다. ‘검이불루’는 백제인의 내면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며, ‘화이불치’는 외면의 격조를 표현한 것이다. 백제인들의 자신감은 북방 문화의 웅건함에서 싹이 텄다. 그들은 해상교류를 통해 문화적으로 성숙하면서 남조 문화의 섬세함을 받아들였다. 시조 온조에서 시작된 웅건함이 부여계의 풍속에서 싹이 튼 것이라면, 백제문화의 특징인 섬세함은 삶의 정신적 지향에서 스며들었다. 백제 후기인 무왕대에 와서 백제문화는 완성된다.
익산은 경주, 공주, 부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고도古都다. 고대 왕국이 갖춰야할 4가지 조건(왕궁, 사찰, 산성, 왕릉)이 금마·왕궁지역에 완벽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왕궁리 유적과 금마 왕궁리 일원에 축성된 10개의 성곽이 왕국의 표상적 공간이라면, 제석사와 쌍릉은 왕국의 존엄성을 과시하고 근간을 확립한 상징적인 공간이다. 고대 왕국의 지배 이념이 재현된 유적지에서 시간의 흐름은 유현하다. 도시 개발에서 한발 비껴선 덕에 시간의 흐름이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그윽하게 자리 잡은 익산. 천 오백 년 전, 세상의 모든 길은 빛의 도시 익산으로 모여 들었다. 익산은 삼한 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것. 하여, 고대 도시 익산의 옛길을 걸으면 지층으로 자리한 선인들의 지향을 만날 수 있다.
미륵사는 구원의 아이콘이었다. 고통과 죄악의 윤회에서 민중들을 구원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던 것. 3원 3탑의 미륵사는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시대의 숭고한 질문이자 시대의 질곡을 넘어서려는 백제인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백제인들은 화강암을 반듯하게 잘라 목탑을 쌓듯 석재를 다듬고 결구하여 쌓았다. 그리고 그 탑의 옥개석을 새의 날개처럼 하늘을 향해 드리웠다. 창의적인 상상력과 조각기술이 합일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미륵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움을 훔친 죄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른다.
백가제해百家濟海, ‘백 개의 가문이 바다를 누빈다’는 건국 이념처럼 백제인들은 안주하기 보다 도전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개화했던 백제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관산성 전투 이후 위축된다. 전쟁에서 왕을 잃은 것. 정국은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북진에 한강유역을 빼앗겼고 무왕에 앞서 즉위한 혜왕과 법왕이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무왕은 적국 신라의 공주 선화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백제의 뿌리를 부여로 설정하여 불만이 많았던 마한계 세력과의 관계 재설정을 위해 자신의 근거지인 익산 천도를 추진한다. 삼한 통일의 대업을 위해 익산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기로 한 것. 미륵사 창건은 쇠퇴해 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우려는 난국 타개의 묘수였다. 정치적으로는 패전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국민을 단합시키고 국가의 부흥을 기약하는 희망의 제시가 미륵사 창건에 구현되었다. 백제인들은 국운 융성의 간절함을 미륵사 돌탑에 간절함을 한 장씩 얹었을 것이다.
무왕은 익산천도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한다. 그는 선대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고자 했던 것. 그는 호방한 사내였다. 재위 37년 3월에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하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 명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익산은 고조선 준왕 이래 기회의 땅이었고, 백제인에게는 온 세상의 바다를 호령하는 도전의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신라와의 13번에 걸친 정복 전쟁을 치루며 무왕은 인도의 아쇼카왕이 이룬 통일제국을 꿈꿨을까.
왕권강화에 성공한 무왕은 금마저(익산)에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축조하고 내불당內佛堂 성격의 제석사를 창건했다. 그리고 동양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 창건으로 새로운 왕국의 비전을 공표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제인들에게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를 실현시킴으로써 구원의 징표를 주려했던 것. 민중들에겐 해방의 심볼이 될 미륵사 건축은 기존의 것과는 달라야 했다. 기존의 사찰 건축이 1탑 1금당 형식이라면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의 설법으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3탑 3금당이 지어졌다.
미륵사에 들리려거든 미륵사터만 보고 떠나선 안 된다. 미륵산과 사자암, 미륵사는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된 입체적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은 사자사가 있는 공간과 미륵사가 있는 공간으로 나눌수 있다. 사자사의 공간은 미륵상생 신앙이 자리 한 과거의 공간이다. 반면 미륵사의 공간은 미륵하생 신앙이 자리한 미래의 공간이다. 미륵산의 옛 이름은 용화산이며 이 산의 능선에 사자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미륵사는 용화산-사자사와 함께 구상된 건축물이다. 또한 미륵사 창건설화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 미륵삼존의 출현’이 불사의 계기라고 했다. 미륵삼존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땅에서 솟았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어쩌면 무왕은 56억 7천만년 만에 온다는 미륵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익산 출생의 무왕은 익산 땅에서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웅진과 사비시기의 백제인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미륵사 창건에는 당대 백제인의 모든 역량이 투입되었다. 미래의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기에 백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미학적 가능성이 미륵사 건축에서 실험되었다. 법당 마당에는 석등과 석탑을 각각 세웠다. 이전에는 재질이 나무였던 기물들이었다. 백제의 예술가들은 보이지 않은 것들도 미학적으로 구현해 냈다. 미륵사 석탑의 처마에 풍탁을 달아놓은 것이다. 풍탁은 신의 기척을 듣기 위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한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미학적 시도다. 상상력을 실현할 줄 아는 백제인의 기술적 역량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익산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은 기와다. 백제기와는 삼국 중에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났다. 특히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되는 기와 겉면에 수부首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체의 예술적 모티브가 뛰어나다. 이 명문은 백제 왕도인 익산과 부여의 왕실이나 최고의 기관에만 쓰이는 문장이다. 백제인들은 흙에 물을 부어 모양을 만든 다음 수부라는 글자를 새겨 바람에 쐬고, 습기가 다 마르기 전에 고온의 불 속에 넣어 기와를 만들었다. 출토된 기와 속에는 당시 백제인들이 상상한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들은 촘촘히 기와를 얹은 끝에 붉은색을 칠한 연화문수막새로 치장했다. 미륵사지의 연화문수막새는 부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형태이지만 연꽃잎의 수가 8엽에서 6엽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익산에서 시작된 대규모 토목공사에 맞춰 대량 제작 방식을 새로 도입한 것이다.
최근 왕궁리 유적에서는 7세기경 ‘왕경王京도로’가 확인되었다. 왕경도로는 자갈과 진흙으로 다진 당시 최신 공법인 ‘노체 공법’으로 건설되었다. 노체 공법은 삼국시대의 왕경도로 등에서만 발견된다. 단순히 궁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도성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교통 인프라까지 구축한 것이다. 또한 정원 배수로의 과학적인 설계와 기이한 괴석이 자연친화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정원유구는 당대 최고의 조경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무왕은 왕궁평으로 천도하려고 성을 쌓을 무렵 제석사를 세운다. 계속된 전쟁과 쌓인 원한으로 삼국의 백성은 서로 격렬한 증오의 불길로 타 올랐을 것이다. 구원의 징표로 미륵사를 세웠다면 왕국을 수호하는 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석천은 부처를 방해하는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는 그물을 사용한다. 이 그물에는 수많은 보배 구슬들이 꿰어져 있는데, 적들이 몰려오면 이 구슬을 흔들어 서로 빛을 발하게 함으로써 어둠의 적을 물리친다. 불법에 귀의하기 전, 제석천은 가장 무서운 적인 아수라阿修羅를 이 무기로 물리치고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불교에 귀의한 후 제석천의 인드라망은 새롭게 변신한다. 세상 모든 존재는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첩첩이 관계를 맺고 있는 인연의 끈으로 인드라망의 의미가 바뀌었다. 제석사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악업을 끊고 왕국을 보호하는 신앙의 징표로 세워졌다.
2016년 초 국립전주박물관은 100년간 닫혀있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일제 강점기 야쓰이가 발굴한 익산 쌍릉의 출토 유물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익산 쌍릉은 백제 사비시기의 무덤 양식으로 왕릉인 부여의 능산리 고분보다 규모가 크다. 쌍릉에 쓰인 목관의 자제는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으로 화려한 금박 장식이 되어 있어 무덤의 주인이 고귀한 신분임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 ‘무강왕과 왕비의 무덤’이 도굴되었음을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이 무덤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무왕과 선화비로 불려 왔다
연구원들이 쌍릉에서 발굴된 나무 편에 적외선 촬영을 하자 희미한 넝쿨무늬가 드러났다. 무덤 주인의 나무베개에 그려졌을 이 문양은 미륵사터에서 나온 금동제사리외호 무늬와 흡사했다. 또 함께 출토된 위금(색을 입혀 짠 비단)직물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급직물로 판명됐다.
1917년 쌍릉 발굴을 주도한 야쓰이는 “쌍릉의 대묘, 소묘 모두…그 형식, 용재는 백제 능묘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며…현실에 잔존한 목관은 실로 백제 말기의 왕족의 관재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하고 귀중한 유물이다”고 비망록에 적었다. 또한 그는 “상세한 내용은 특별 보고에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했으나, 특별보고서는 현재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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