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독립운동가·의병. 호는 야은(野隱), 익산군 출신.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이규홍(李圭弘)의 사이에서 의병활동을 한 의병인 동시에 한일합방 이후 독립운동에 전력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1906년 4월 25일 정읍군 태인면 종성리에서 최익현(崔益鉉)이 의거를 일으키자 이규홍(李圭弘)·문형모(文亨謨)와 함께 참가하였다. 이 때 박이환은 옥구·임피·함열·용안·익산 등지를 다니면서 황제의 뜻을 전하여 의병활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이 체포되자 최익현의 진영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7년 10월까지 의병을 모집하여 형 박영환(朴永桓)이 제공한 군자금으로 총기 3백여 정·탄환 20여 두(斗)·군도(軍刀) 50여 점·화약 10여 두를 준비하여 의병운동에 대비하였다. 1907년 11월 6일 함께 궐기한 이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副將)이 되어 2백 50여 명의 대열을 구성하였다. 11월25일 고산면 가금리에서 적과 교전하여 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월 3일 진산·금산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또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2월 초순부터 전개된 일본군의 의병대 토벌작전에 따라 별 수 없이 자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14년 3월 최익현 진영의 정신적 지주였던 돈헌 임병찬(林炳瓚)이 고종황제의 칙지(勅旨)를 받들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를 창설하였음을 전해 듣고 그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 때 박이환은 익산·임피의 대표로 활약하였는데 적에게 행적이 드러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지하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