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의사. 본관은 김해(金海)로 호는 삼산(三山)이다.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출생이나 이리시에서 살았다.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1년을 앞두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익산에 전달하여 궐기대회에 선봉이 되어 행진하다가 왜경에 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三山醫院)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28세에 이리 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 청년회관도 건립하였다. 1945년 수복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동년 9월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쟁하기 위하여 동년 12월에 이리,익산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전북지부 부위원장이 되고, 동년 9월에는 세브란스 재단법인 이사에 피선되었다. 1947년 3월 대한농민총연맹 전북위원장이 되고, 동년 4월 이리읍이 부(府)로 승격되자 초대부윤(初代府尹)에 취임하였고, 4월에는 대한농민총연맹 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동년 1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이리시당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의 전북당지부 최고위원이 되었다. 6·25사변을 당하여 부산에 피난 중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다가 UN군의 진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