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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유적

백제왕궁박물관에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일반현황
유적명 : 익산 왕궁리유적
(사적 제 408호, 1998. 9. 11 지정)
지정면적 : 216,862㎡
유적 내에 국보 제 289호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 있고, 인근지역에 동쪽으로 익산 제석사지 2㎞, 북서쪽으로 익산 미륵사지가 약 4.8㎞ 거리에 위치함.
연혁
백제 30대 무왕(武王 : A.D.600 ~ 641)대에 조성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됨
1965년 : 석탑 해체보수
1976년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시굴 조사
1989년 ~ 현재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왕궁리유적 사진
  • 왕궁리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 왕궁리유적의 왕궁은 백제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확인되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왕궁의 외곽에는 폭 3m의 담장을 동서 245m, 남북 490m인 장방형으로 두르고 있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국가의 중요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 왕이 정사를 돌보던 건물,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4개의 동서석축을 쌓아 구분•배치하였다. 북측 절반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왕궁의 서북측에는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 이와 같이 왕궁의 남측에 의례나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배치하는 것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서 당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에 문화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왕궁으로 일정 기간 사용한 후 사찰로 바뀌어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사역 동남측 일부에서는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백제왕궁 왕궁리유적 관련사진01 백제왕궁 왕궁리유적 관련사진02
왕궁의 담장(宮墻)
왕궁의 담장은 왕궁 내•외부의 경계와 함께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담장의 폭은 3m로서 외면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으로 쌓고 내부는 점토와 자갈을 혼합하여 채워졌다. 담장은 대부분 제거되고 동남측에서 100여m, 남측, 서측 담장에서 극히 일부만 부분적으로 석재 1〜2단 정도의 높이 까지만 남아 있다. 그로 인하여 담장 상부 구조에 대해 석재로 계속 쌓았다는 의견과 함께 1〜2단 석재 위에는 판축을 하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담장 상부 구조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만 담장의 지붕은 주변에서 다량의 기와편이 수습됨에 따라 기와지붕으로 보고 있다. 담장의 내•외부에는 폭 1m에서 1.2m 정도로 편평한 돌을 깔아 놓았는데, 빗물에 의한 담장의 훼손방지를 위한 시설 또는 보도로 추정되고 있다.
남측 담장에는 3개의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남측 담장의 중심에서 14.5m 서편으로 치우쳐 중문의 중심이 위치하고 있어서 왕궁의 남측 중심이 서측으로 치우쳐 있다. 동측과 북측, 서측 담장에는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조사되어 왕궁의 담장에는 총 7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유적 관련사진
석축(石築)
백제왕궁의 남측 절반에는 건물이 들어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동서방향의 석축 4단을 쌓아 공간을 구획하였다. 건물이 들어설 부분을 하나의 평면으로 하지 않고 4개로 나누어 조성한 것은 노동력 절감과 함께 공간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남측 제1석축은 지대석 위에 가공된 사구석 7단이 남아 있는데, 원래 높이는 약 2m 정되는 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 석축은 0.5m 정도 이다. 동서석축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 폭은 남쪽에서부터 76.6m, 44.5m, 72.3m, 45.7m로서 대략 2:1:2: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비례 개념은 왕궁의 전체 공간을 남측과 북측 1:1로 구분하는 것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왕궁리유적의 왕궁은 공간 활용 과정에서 2:1 또는 1:1이라는 비례개념을 염두에 두고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어서 왕궁이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궁리5층석탑 관련사진01 왕궁리5층석탑 관련사진02
정전 건물지(대형건물지)
정전건물지는 왕궁의 남측 담장에 연결된 3개의 문중 중앙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로 만나는 건물이다. 정전건물지는 토심적심건물로 적심에 의해 동서 7칸, 남북 4칸으로 규모는 동서 35m, 남북 18.3m로서 왕궁 내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기단은 동측기단부근에서 갑석으로 보이는 1점만 남아 있었다. 이 건물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제1동서석축에 최대한 가까이 건립하여 건물의 앞에는 조회나 의례, 의식을 행할 수 있는 넓은 마당이 만들어 졌다.
와적기단 건물지
와적기단 건물지는 건물의 기단부를 지붕에 사용되었던 기와를 재사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왕궁리유적에서는 제3 동서석축 앞에서 3기가가 조사되었다. 와적기단은 석재기단에 비해 내구성은 떨어지지만 다양한 형태로만들 수 있어서 장식성이 돋보이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왕궁리유적에서 와적기단은 모두 기와를 편평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기단부의 일부는 석재를 사용한 곳도 있다.
정원(庭園)과 후원(後苑)
왕궁 내 정원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서 왕궁리유적에서는 정원의 중심부와 정원 중심부에서 필요한 물을 모으고 공급하기 위한 시설, 누각형건물지 등 후원으로 구성된다. 정원과 후원은 왕궁의 북측 절반중 공방지를 제외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왕궁 내에 중요한 시설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왕궁리유적의 정원은 후원이 시작되는 동서석축4의 동측에 치우쳐 정원의 중심부와 수조시설, 배수시설, 집수시설과 보도, 정자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정원의 중심부는 기암괴석을 세우거나 깔고 앞면에 장대석을 凵형으로 배치하고 내부에는 강자갈을 깔아 물의 흐름을 조절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백제의 전통적인 정원은 연못 형태였으나 기암괴석을 세워 주변 경관을 축소하고(縮境) 그 앞에 연못을 연결하여 새로운 형태의 정원을 창안하였다.
정원 중심부의 서북측에는 판석을 세우거나 바닥에 깔고 그 사이는 회록색점토로 메워 동서 47.5m, 남북 2.96m 의 대형 수조를 만들어 정원으로 물을 공급한 수조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정원의 동측에는 보도시설과 정자건물지, 동남측에서는 정원에서 빠져나간 물을 모아두는 집수지가 확인되었다. 후원은 내원(內苑), 외원(外苑), 금원(禁苑), 원림(園林), 원유(苑囿)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워 왔는데, 돌과 물, 나무, 흙 등 자연물과 인공물, 건축물 등이 모여서 조경시설을 구성하게 된다.
왕궁리유적의 후원은 대부분 정원 중심부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로서 U자형수로(環水溝), 곡수로(曲水路)와 방형초석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후원의 기능은 왕을 위한 휴식과 오락의 장소이면서 왕실의 제례도 행해지던 신성한 영역으로 왕실을 위한 사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왕궁리유적 관련사진
공방과 생활관련 시설
왕궁리유적에서는 금제품, 유리제품 및 그 원료,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등 다양한 종류의 생산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왕궁 내부에 왕실 직속의 수공업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방지 남쪽에서는 대형의 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1호 대형화장실(공중화장실)의 규모는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이다. 이 대형화장실은 왕궁 내에서 나오는 오물의 처리와 관리나 궁인, 공방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화장실 유적은 왕궁리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이웃한 일본의 화장실유적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왕궁의 부속시설 관련사진01 왕궁의 부속시설 관련사진02 왕궁의 부속시설 관련사진03
사찰관련 시설
왕궁리유적은 처음 축조될 때에는 왕궁이었다. 왕궁으로 일정기간 사용 후 사찰로 변화한다. 사찰로 변화 과정에 탑, 금당, 강당 등 중요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한정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활용하였다. 사찰로 용도가 변화한 정확한 시기와 석탑의 건립 연대 등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늦어도 의자왕대에는 사찰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유적 주변에서 많이 수습된 ‘왕궁사’, ‘대관관사’, ‘관궁사’ 등의 명문기와를 통해서도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된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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