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에 들어서자마자 미륵산 아래 펼쳐지는 광활함이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한강유역을 잃고 이 땅에서 있던 1,400여년 전 무왕의 마음은 이랬을까? 최근에 복원된 동탑(1992년)이 청량한 풍경소리로 관람객을 맞는다. 1997년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으로 들어가 보자. 전시관 한가운데 위치한 미륵사 축소 모형이 제일 먼저 눈에 띤다. 미륵사지의 3탑 3금당의 가람배치가 세상사 어지러운 마음에 고요한 질서를 전해준다. 미륵사지가 세워진 곳은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가 미륵산(용화산)에 사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도중 만난 미륵삼존불이 출현한 자리다.
익산 쌍릉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익산시 석왕동 야산에 두 개의 큰 무덤이 생겼다. 이곳에서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는데 가끔 칠흑 같은 어둠 밤에 불빛이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불춤을 추고 나면 마을 아낙 중에 누군가는 배가 불룩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 불이 아이를 점지한 것이라고 믿었다. 동양의 전통사상에 의하면 불은 남녀간의 합환을 상징하는 것.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불춤의 영험함을 볼 때마다 그 무덤 앞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이 신기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마을의 몇몇의 초로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각각 선화공주와 서동이라고 믿으며 이를가리켜 쌍릉이라고 불렀다. 불춤의 영험함을 서동설화의 주인공의 조화로 여겼던 것이다.
왕궁리 5층 석탑
수투파는 무덤을 이르는 말로 탑의 오래된 이름이다 인도에서는 무덤 위를 탑처럼 뾰쪽하게 장식한다. 그런데 수투파 양식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우선 귀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땅에 묻을 수 없기에 탑을 쌓아 올려놓고 그 위에 사리를 두는 복발(覆鉢)로 마감한 것이다. 복발은 '사발을 엎어두었다' 는 뜻으로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그대로 무덤의 형태이다. 그 복발 위에 찰주를 세우고 상륜부를 만들어 탑의 위엄을 높인 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아름다운 탑 양식으로 승화되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탑은 처음에는 목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넓은 벌판 뿐인 대륙에서 나무를 구하기 어려웠기에 벽돌로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탑(塼塔)이다. 중국의 대부분의 탑은 전탑 형식이다.
백제 왕궁터
1965년 한 무리의 전문가들이 기울어 가던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수했다. 목적은 붕괴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보수 과정에서 한국사를 다시 써야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탑의 내부에서 역사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탑의 1층 옥개받침과 기단(基壇) 사이에서 사리병과 금제금강경판, 그리고 금동불상과 옥, 방울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출토되자 마자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이 탑의 주변에 대한 발굴 작업이 세밀히 이뤄졌다.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에서는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에 위치한 금당 건물터 조사가 이뤄졌다. 학계에서는 왕궁리 일대가 백제 무왕이 부여에서 이곳으로 나라를 옮긴 왕궁이었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왕궁리라는 현재의 지명은 그 이유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보면 왕궁리 유적지에서 탑을 중심으로 한 곳은 왕궁 내에 위치한 내불당이 된다.
고도리석불입상
사랑은 지상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견우와 직녀가 만났다는 오작교는 사랑의 가교(架橋)다. 영원이라는 말은 아마 영혼까지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바로 옆 금마면 고도리에는 석불입상 두 기가 200m 쯤 떨어져서 마주보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인근 논에 버려져 있던 것을 조선 철종 때의 익산군수 황종석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석불입상의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라고 하는데 처음 보는 이는 어느 쪽이 여자인지 갸우뚱한다.
함라마을
창작의 모태였던 조선시대 유배지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허균은 광해군 3년(1611년) 43세의 나이에 함열(현재의 함라)로 귀양을 떠난다. 시험부정 사건에 연류된 것이다. '광해군 일기' 에는 과거시험관이었던 허균이 조카와 사위를 부당하게 합격시켜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배지 함열은 허균이 자원했다. 당시 함열 현감인 한회일(인조비 인열왕후의 오빠)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봉사
"준왕은 천하의 모든 것을 가졌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익산이라는 지명이 한반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194년이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쫓겨 이곳에 찾아 들었다. 이윽고 터전을 잡고 마한의 왕이 된 영험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득남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래도 아들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왕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봉황 한마리가 갑자기 높이 솟아올랐다. 왕은 눈이 부셔서 봉황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솟아오른 봉황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다시 훨훨 날아 미륵산 넘어 어느 작은 산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꿈이 깼다. 상서로운 꿈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 챈 왕은 봉황이 앉은 곳을 찾아 그곳에 석불(石佛)을 정성껏 모시고 기도에 정진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백일이 지나자 왕비는 임신을 했다. 이후 왕은 세 아들을 얻었고 아들들의 태(胎)를 묻은 후 산의 이름을'태봉(胎峯)'이라고 불렀다.
연동리석불좌상
금마에서 여산가는 1번 국도는 천 년 전에도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정유재란 때 금마쪽으로 쳐들어 온 한 무리의 왜군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장의 부대였다. 그런데 파죽지세로 밀려온 왜군들은 금마지역에 들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진격을 해보려고 하면 안개가 끼어 대낮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왜군의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사람을 풀어 염탐케 했더니 병사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작은 절에 모셔진 부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서 왜군이 빨리 사라지기를 기도하고 있더라"는 보고를 올렸다. 왜군 장수는 한 밤에 그 영험하다는 석불을 찾아 갔다. 석불은 밤인데도 광채가 빛나서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안개의 조화가 빛을 발하는 석불의 탓이라고 여기고 칼을 휘둘러 석불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돌아와 진격하려고 하는데 맑은 하늘에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 비에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막사도 비에 젖어 들었다. 마지막 남은 화약까지 모두 젖어 쓸모가 없게 되자 이때 낫과 죽창으로 무장한 의병들이 습격하여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보석박물관
보석의 도시 익산에서 만나는 국내 최대규모의 귀금속판매센터 주얼팰리스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과 장인의 손길로 만든 보석작품을 만나보자 주얼팰리스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귀금속보석판매센터이다. 단일규모로는 최대라고 하는데, 지난 2010년 9월에 개관하여 현재 1층과 2층 에 80여개 매장이 운영중이다. 각 매장은 높은 경쟁룰속에 선정된 유럽, 중동국가 등 해외수출업체와 익산 귀금속가공단지의 공장직영업체, 국내유명업체 등 현대적인 감각의 보석디자인과 장인의 솜씨로 빚어낸 주얼리 작품들을 판매전시하고 있다.
영화촬영관
차가운 콘크리트와 빛 한점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 창살. 그리고 원죄를 개끗이 씻고 있는 갇힌 영혼들. 익산시 성당면에 위치한 교도소세트장의 선을 넘어 들어오면 모든 것들은 암울하다. 하지만, 교도소세트장의 암울한 이미지들은 익산시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아이러니일까? 익산에서는 <아이리스>와 <수상한 삼형제>의 촬영지였고, 영화<홀리데이>, <거룩한 계보>, <타짜> 등 많은 작품들이 촬영되면서 전주 와 함께 익산이 영화의 메카로 급부상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심곡사
심곡사를 속으로 되뇌이면 아주 깊은 계곡에 있는 절이라는 느낌이 든다. 익산처럼 평야가 즐비한 땅에 깊은 계곡이 어디 있을까? 산악지대에 살았던 사람이나 오지를 돌아다녀 본 사람이라면 '심곡(深谷)' 은 익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심곡의 깊이는 세상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심상의 것이리라. 심곡사는 실제 깊은 골짜기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심곡사를 정서적인 깊이로 상상한다. 익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미륵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높이가 430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의 규모에 비해 전국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평지 돌출형의 암산인 미륵산은 김제의 모악산과 함께 오랜 세월 신령스러운 산으로 추앙받아왔다. 미륵산은 원래 용화산이다. 그런데 미륵사가 건축되면서 산 이름이 미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불가에서 후생세계를 구원한다는 미륵, 하긴 미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은 익산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서동축제
익산은 서동설화와 서동요가 살아있는 천년고도로 서동요를 통해 선화공주의 사랑을 얻고 마침내 백제 30대 무왕으로 등극해서 삼국통일의 웅지를 펼치려 했던 서동의 탄생지입니다.
또한, 마한의 도읍지이자, 백제 말기의 수도 혹은 별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익산서동축제는 1969년 마한민속제전으로 시작했으며, 국경(백제,신라)을 초월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세계적인 사랑과 서동요의 본고장임을 알리기 위해 2004년부터 서동축제로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천만송이국화축제
매년 10월말 ~ 11월초 사이 익산 중앙체육공원에서 열리는 축제이며, 국화 야외 전시 및 우리지역 농특산물 홍보 및 판매, 전국 국화작품 경연대회, 문화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전 시민이 함께하는 지역축제로서 주요도심 국화식재 및 축제기간에 아파트 베란다, 상가, 각급기관, 단체 등에 국화화분 내놓기 범시민운동전개로 통합축제의 성공적 개최 및 익산 도시브랜드 이미지제고 축제이다.
익산보석대축제
보석도시 익산에서 4월, 9월말에 개최되는 대한민국 유일한 귀금속 총판 신상품 전시회로 세계수준의 규모를 자랑하는 익산보석박물관에서 개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