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석(張準錫, 1903∼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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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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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 호는 천원(天圓). 본관은 인동.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출신. 감찰(監察) 장치명(張致明)의 아들, 경성 중동학교를 졸업한 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평민대학(平民大學) 정경과에 적을 두고, 독립신문(獨立新聞) 북경지국장을 하며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1925년 조선일보사 경리부원으로 근무하다가, 1936년 동경 일본대학 문과에 유학중 신간회(新幹會) 동경지부 상임위원과 재동경 조선인단체 대표자회 대표로 피선되었고, 10여 차례의 투옥으로 학교에서 추방되어 귀국 후 농촌개발에 앞장섰다. 1940년 전라북도 평의원에 피선, 일인과 싸웠고, 1942년 동진수리조합 평의원으로 농민 권익에 앞장섰다. 1957년 수리조합법 개정추진위원장, 1960년 동진수리조합장, 1951년부터 남성중·고등학교 후원회장, 1962년 재단법인 화성학원(華星學院) 제 3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 만경중학교 감사, 청하면장, 농촌위생원의 감사직을 맡은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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