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중열(仲悅), 본관은 수원(水原), 전주 출신. 1570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재랑(齋郞)이 되고, 1576년 왕에게 잘 보여 괴원(槐院)에 들어갔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승진하였다. 이 때 율곡 이이(李 珥)가 죽고 조정이 동서당쟁으로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익산 용안에 칩거하면서 백운암(白雲菴)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사건이 일어나자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에 임명되고,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였으며 이 때부터 조정의 신망을 얻게 되어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 검상사인(檢詳舍人)에 이르렀다.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뒤집혀 탄핵을 받아 경흥에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돌아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그 후 부승지(副承旨)에 전임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호군(護軍)으로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이첨(李爾瞻) 등 당쟁에 연루되어 부안으로 귀양갔다가 용안으로 옮겨지고 곧 사면되어 개성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