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렬(丁貞烈, 1876∼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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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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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판소리 명창, 익산 내촌리 출생. 정창업(丁昌業)의 문인. 7세때 이미 창악가의 소질이 보였기에 부모가 그를 정창업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 공부를 하게 했다. 정창업이 그가 14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자 그후로 이날치에게 사사받았다. 그러나 2년 후 16세때 이날치 또한 별세하니, 그로부터 독공하였다. 오직 소리 공부에만 전념하여 익산의 신곡사(神谷寺)에서 수년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수년간 기예를 닦아 점차 소리가 성숙해지고, 다시 공주 갑사(甲寺)에 들어가 40세까지 연마 적공하여, 이때 이미 그의 실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가를 이룬 그는 마산에 가서 몇 해 동안 후배를 지도하는 동안에 그의 명성은 서울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1926년 서울에 올라가니, 수많은 남녀 연소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등과 친교하며 기량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고 성망이 드높게 되었다. 수백명의 각처의 제자들과 또한 친교가 두터운 몇몇 대가들과 함께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상무이사로 일하면서 그의 생활은 조선성학연구회와 기거를 같이 했다.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곡과 가사를 정로를 더듬어 새로운 방향을 탐구했다. <춘향전> <심청전>을 완전히 창극으로 상연하게 된 것도 다 그의 노력의 결정이었다. 수련의 적공으로 탁한 성음과 부족한 성량을 극복하여 대성하였는데, 정창업·이날치의 지침을 받아 서편제의 규범을 많이 계승하여 수리성으로 소리를 맛있고 재미있게 했다. 소리로서 눈을 보는 듯이 근경과 정상을 뚜렷하게 밝혀내고 붙임새가 능한 점으로는 당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순회공연, 라디오 방송, 음반 취입 등 창악 발전에 분주한 생활로 생애의 후반을 장식했다. 특장은 <춘향가>중에서 신관 사또 부임하는 대목이다. (제10편 문화예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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