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무신. 자는 신중(愼中), 본관은 강화(江華), 익산군 출신. 장사랑(將仕郞) 봉기(鳳起)의 아들. 인조 14년 무예 갑과에 급제하여 곧 훈련판관(訓練判官)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병(淸兵)이 입성하자 어가(御駕)가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세에 처하여 있었다. 그는 죽기를 맹서하고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여 임금을 보호하고 손수 어가의 말고삐를 잡았다. 시종 임금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좌우에서 성을 방위하는데 온갖 힘을 다하였다. 임금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하였다. 그때 임금이 전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지키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니 환궁하면 후에 크게 포정(褒旌)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래지 않아서 목숨을 마쳤다. 그 사적이 선무언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 및 절의록(節義錄)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