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호는 우당(愚堂), 본관은 남양(南陽). 금마면 출신.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수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귀국하여 항일운동에 투신 활약중 일경에 체포되어 1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해 활약했다. 1929년 초에는 신민부 산하 고려국민당 중앙검사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군자금 모금차 입국하였다가 신의주에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체포된 후 일경의 고문과 혹형으로 쇠약해진 그는 1929년 10월 신의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8년 지방민이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東古都里)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고, 1977년에는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